왜 나는 공부를 하고 있을까?

왜 나는 공부를 하고 있을까?

나는 가끔 내가 왜 지금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을까? 생각을 하곤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아마도 나보다 먼저 이러한 길을 걸었던 사람이 고민했고, 또 지금도 고민하고 있을 주제라고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한 십여년 전에 주변 선배가 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기억이 난다. “판검사는 집안이 편안하고, 의사는 가족이 편안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본인만 좋다.” 나 스스로가 판검사나 의사가 못 되었을지라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말의 의미를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공부하는 후배들이 결혼에 대해 나의 생각을 물어오면, 미안하게도 가장 먼저 후배의 직업을 물어본다. 그 친구의 직업을 몰라서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가 나의 직업을 물어보면 연구원이나 포닥이라고 말하지 않고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현실적으로 돈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또 공부를 하면서 가족을 건사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너가 지금 결혼을 생각하는 친구가 네 인생의 반려자라는 생각이 들면 결혼을 하겠다는 너의 생각에 토를 달 생각은 전혀없다. 오히려 너무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네 직업이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는 그렇게 정의한다. 공부하는 사람은 현 시대에 맞지 않고, 본인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본격적으로 나의 얘기를 하기전에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기술한 것임을 밝힌다. 경제적으로 전혀 여유롭지 않으면서, 내 스스로가 어릴 때부터 꿈궈오던 삶을 살고있지 않은 나에게 국한된 이야기이다.

내가 공부하는 것을 현 시대에 맞지 않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극소수의 학문을 제외하고는 공부한다는 행위자체가 가장 비정상적인 경제행위일 것이다. 공부를 하게 되면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크다. 본인의 경우에 비추어보면, 일년에 적어도 3천만원 정도의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학위과정과 정규적인 직업을 갖기 전까지의 기간을 고려해 보면 적어도 2.5억원 이상의 총 기회비용이 발생하리라 생각한다. 본 금액은 복리따위나 현가 등의 개념을 고려하지 않은 초등학교 2학년의 산수에서 도출된 총액이다. 나의 드림카를 두 대나 사고도 내 아내에게 제네시스를 사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내가 믿는 바에 따르면, 적어도 박사학위를 받고, 정규적인 직업을 갖기위해 박사후과정까지의 인고의 시간을 갖고있는 사람들의 개똥 이성에 비추어보면 지극히 미친 짓일 것이다. 그러니 확실히 자본주의 사회에 맞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본인만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내 아내의 경우 나의 고집 아집 오만상 나 혼자 생각에 두손 두발을 다 들었지만, 나의 부모님과 법적 부모님, 그리고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혈연지간의 일부 사람들은 내가 공부를 하는 것을 막연한 기대만으로 인고하고 있다. 모두에게 큰 걱정만 보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정규직업을 갖게 된다고 해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친한 선후배에게만 했던 십선비 노릇 밖에 없을 듯 하다. 나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나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혹시나 나처럼 정상적이지 못한 사람이 공부를 하게 된다면, 내가 왜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또 왜 공부를 하고 있는지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술마시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왜? 정말 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 개똥철학때문이다. 나는 믿음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신에 대한 믿음도, 본인이 존경하는 혹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아닌,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은 아주 어릴때부터 생성된 것으로 지금은 나에게 종교이다. VERITAS LUX MEA. 나를 아직까지 설레이게 하는 말이지만, 내가 서울대학교를 가야겠다고 막연하게 꿈꾸었던 그 시절부터 나에겐 신앙과 같은 말이었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시대를 같이 이겨내온 사람들에게는 바로 저 VERITAS LUX MEA가 한 번쯤은 가슴을 설레게 했던 말이라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면 공부를 하면서 저 말이 나에게는 공부를 하는 이유가 되었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믿는다. 진리는 있다. 다만, 그 진리를 우리가 또는 내가 못 밝혀냈을 뿐이라고. 내가 지금도 공부를 하는 이유는 그 진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기합리화로 점철된 나의 인생에 너무나 큰 의미여서 그 믿음이 무너지는 날에 내가 두 발을 딛고 여기에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막연히 지금 나와같이 비정규 지식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둘째, 희열 때문이다. 나는 공부를 하는 과정이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라 생각한다. 사실 내가 이 귀한 시간을 들여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너무 큰 좌절을 오늘도 겪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내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에서 노벨상과 같은 상을 받은 사람과 한 시간 반 정도 미팅을 했다. 나는 정말 빠가야로였고, 내 영어는 아직 세 단어 정도밖에 말을 못하는 내 아들과 같은 수준이었다. 내가 가진거라곤 불알 두쪽과 그 것보다 더 가벼운 자존감밖에 없지만,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하루였다. 오늘도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를 끝없이 되내이며, 집으로 돌아와 맥주만 들이키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죽지 않고 며칠 뒤면 또 웃고 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너무나 사랑스런 나의 처자식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어느 순간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에게 큰 절망을 줬던 그 천재의 인사이트에 감탄하며 어제와 완전히 다른 내 논문을 보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고 있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그 희열이 나를 공부하게 만든다. 부인할 수 없는 이기적인 내 삶의 원동력이다.

셋째, 책무 때문이다. 나를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나는 사회에 큰 책무를 느낀다. 나는 정말 리터럴리 빈농의 자식이다. 사교육은 내가 재수할 때 월 20만원하는 학원을 다닌 것을 제외하곤 받아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그 월 20만원도 우리 아버지에게는 큰 투자였으리라. 몰락한 잔반이 다시 출세할 수 있는 마지막 배팅 같은.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 크게 감사해 한다. 나의 미천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부터 가정을 이룬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의 경제적인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50년 전만해도 나와 같은 미천한 재주를 가진 자의 지적 유희에 공동체에서 돈을 모아주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학부 때부터 주변인들에게 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해 왔다. 미국에 나와서 내 논문을 접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묻곤 한다. 너 스스로가 자랑스럽지 않냐고. 하지만 정말 나는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 논문 한 편이 사실 수천만원의 비용이 들어간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것이 부족한 내 재주를 믿어준 그 사회에 대한 사람 도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가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용기가 없고, 때로는 비겁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나에 국한된 이야기다. 다른 공부하는 사람들을 욕되게 할 생각은 전혀없다. 가장 도전적이어야 할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가장 내 스스로를 최적화하는 삶을 살아왔다. 나 역시도, 고시를 3개월 준비해 봤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는 의전을 갈까 잠시 고민도 해봤으며, 군복무를 마칠 때 쯤에는 로스쿨을 가야겠다고 내 인생 유일무이한 스터디그룹에 면접을 보고 참여하기도 했다. 모두 다 결과적으로 그만 두거나 실패했다. 고시준비시절은 아마도 다 합쳐도 200시간도 공부하지 않았던 것 같고, 의전은 생각만 했을 뿐이며, 로스쿨은 50시간도 공부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모든 것들을 진정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름 장고 끝에 고시 패스가 인생 제일 편하게 가는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기에 시작을 했었고, 의전은 돈벌이가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주 잠깐 고민을 했었으며, 로스쿨은 정말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은 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전하지 않았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분명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가장 리스키한 삶을 살고 있다. 이제 나는 아마도 십중팔구 평생을 비정규 지식노동자로 입에 풀칠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짧지 않은 삶을 살아온 나에게 가장 큰 교훈이 있다면,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고 지름길은 없다는 것이다. 막말을 조금 보테면, 지금 내가 좋은 저널에 논문을 한편 쓸 시간과 에너지를 과거에 투자했으면, 의전이나 로스쿨에서 지금보다는 더 경제적인 행위를 했었을 것이다. 병원에 갈때마다 ‘의사는 못 되길 잘 했어.’ 라고 생각하지만, 고위공무원이나 법조인에 대한 미련이 없지는 않다. 나의 삶을 객관화할 때면, 그런 삶이 부러울 때도 많다. 하지만 이 모든 미련들이 나의 용기 없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지금 공부하는 사람으로서의 내 삶에 후회는 없다. 내 삶이 매우 만족스럽다. 자주, ‘그래 공부하길 잘 했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내 아들이 공부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하지만 나도 인간이기에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것 일까하는 스스로의 의문을 항상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또, 자주 두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내 마음이 진실로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