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신분제도. 비정규직 연구원과 정규직 연구원

나는 박사 졸업 후, 교수 지망생이 되어 누가 나 캐스팅해주나 기다리면서 30대 중반을 보내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여기저기 공공기관에 원서를 썼고, 구직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목표하던 직장에 취직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출근한지 딱 5주가 지났다. 본래는 ‘연구소로 가지 않은 박사의 직장 적응기’와 같은 글을 쓰려 했으나, 중간에 설연휴까지 끼고 한달도 출근도 안한 주제에 ‘적응기’라는 글을 썼다가는 전국 수많은 직장인 여러분께 코웃음을 살것이 뻔하다. 그래서 그런 글은 다음으로 미루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달동안 느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점에 경험위주로 대해 쓰기로 했다. 이 글이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는 학부생들이나, 국내 취업을 생각하는 대학원생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는 내가 여기에 밝힐 이야기가 기밀각서에 서명한 내용에 저촉된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대로 나는 누구나 접속해서 볼 수 있는 내 직장 홈페이지의 조직도에 나와있는 것 이상의 기밀은 말하지 않았음을 서두에 밝히며 쉴드를 쳐본다. 뭐 그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내 느낌을 담아 쓸 생각이다. 내 느낌은 내 기밀이지, 회사 기밀은 아니잖아.

대부분의 정출연이나 연구직을 많이 뽑는 공공기관들의 연구직은 다들 상황이 비슷할 것 같은데(기관들끼리 서로 눈치보면서 맞추니까, 아니면 정부부처에서 기관들 처우를 제한하기도 하고.) 우리 기관의 연구직 직급은 크게 네개이다. 위에서부터 따지자면, ‘연구위원’, ‘부연구위원’, ‘연구원’, ‘위촉연구원’ 순이다. ‘선임연구원’이라는 높은 급도 있지만, 그건 몇명 안되니까 제외하고. 물론, 실장, 본부장 같은 직함도 있으나, 원칙적으로 그건 그 사람이 맡고 있는 일종의 포지션이고, 조직개편등의 상황에 따라서는 다시 그냥 실원이 될 수도 있다. 연구원 이상의 직급은 정규직이고, 위촉연구원부터는 비정규직이다. 주로 2년 계약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쨌든, 나처럼 박사까지 졸업하고 오면 ‘부연구위원’이라는 직급을 받는다. 위에는 한 직급밖에 없고, 아래는 더 여러개의 직급이 있으며, 아래로 갈 수록 사람도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박사대접은 확실히 해주는 셈이다. 내가 배정받은 팀에는 나랑 동기로 들어온 형님도 있는데, 이 분은 석사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다른 곳에서 몇년 하다 온 분이다. 이분은 석사출신이기 때문에 ‘연구원’의 직급을 받았다. 그럼 직급상 ‘연구원’보다 아래있다는 ‘위촉연구원’은 학부출신이냐. 아니다. 이분들도 다 석사학위는 갖고 계신 분들이다. 아. 그런데 빠뜨린 이야기가 있다. 위촉연구원부터는 비정규직이다.

박사를 받았으면 더 좋은 대우를 받는게 당연하다거나, 혹은 반대로 박사든 석사든 동일 노동을 하면 당연히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건 아니다. 그런건 상황마다 다를 수 있다. 특정 전공자들만 모여있는 연구소라면, 아무래도 박사까지 한 사람이 석사만 한 사람보다 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전공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있는 집단에서는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박사병에 걸린 박사들은 박사학위를 하면 마치 중생에서 해탈을 하여 붓다가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면서, “박사는 자격증이 아니라 닥터오브필로소피라고!!”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허나 사실 박사는 그냥 자격증이 맞다고 생각한다. 변호사 자격증 있는 사람도 식당주방에 가면 쉐프는 커녕 조리사 자격증 있는 사람 앞에서도 바보되는거고, 제 아무리 미슐랭이 인정한 쉐프인들 법정가면 판검사 변호사 앞에서 밥이 되는거다. 자, 그럼 쉐프랑 조리사랑 변호사랑 변호사 보조랑 축구를 한다. 그럼 누가 축구를 제일 잘할까. 그냥 축구 제일 잘하는 사람이 축구 잘하는거지, 변호사고 조리사고 다 필요 없는거다.

지금 내가 있는 조직이 그렇다. 우리 팀은 10명 정도 되는데, 전공이 같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 그냥 여기 일을 잘하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거다. 나는 내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어쨌든 꽤 높은 직급에서 일을 시작했다. (당연히 높은 직급에 높은 월급으로 시작하는걸 원했지만…) 입사한지 이틀만에 연구책임자가 되었으며, 연구비카드는 일주일만에 나왔고, 다른 연구원들이 결재를 올리면 내가 결재를 한다. 같이 일을 할 경험많고 똑똑한 위촉연구원도 붙여줬다. 얼마나 박사란 위대하고 아름다운가.

허나, 입사한지 이틀만에 함께 일을 하는 위촉연구원’님’ 앞에서 그깟 박사학위가 얼마나 노쓸모인지 느끼기 시작해서 5주가 지난 지금까지 위촉연구원님의 위대함과 존경심만 커지고 있다. ‘아무리 박사라고 해도 처음부터 잘할리 없는게 당연하다’, ‘박사까지 했으니 적응하면 포텐 터지겠지’라고 누군가 위로하려 들지도 모르겠다만…. 그렇게 나 스스로 생각하려 해도, 그 분은 진짜 똑똑하다. 다른 박사와 함께 작년 내내 손발을 맞췄던 그분은 업무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알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직장 내 모든 사람이 그 분을 칭찬한다. 능력적으로 성격적으로 완벽하게 검증된 인재다. 나한테 입사 이틀만에 연구책임자를 맡긴 우리 팀 사람들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다. 작년에 그 일을 해봤던 그를 붙여줬으니까. 내가 아무리 바보여도 그분 하나면 레지던트이블의 여전사처럼 모든걸 다 해결할 수 있을 있을 것이라고 믿는 눈치다.

그리고 팀원들의 예상대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분은 산타할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내가 해야할 일을 산타할아버지처럼 처리해주신다. 지금 그분과 내가 하는 업무 프로세스는 대충 이렇다. 누군가 나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아무개 박사님, 안녕하세요. 어쩌구 저쩌구 해서 XXX를 해주세요’

그럼 나는 그 이메일을 읽어본 후, ‘이게 무슨 말이지?’라며 고개를 갸우뚱 한 뒤, 그분에게 포워딩한다. 그럼 한두시간, 혹은 업무 크기에 따라 하루나 이틀 뒤, 엑셀파일을 하사해주신다. 그리고 내 자리에 와서 이게 무슨 말인지 그래서 자기가 뭘 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럼 나는 그 파일을 다운받아서 나한테 이메일을 보낸 사람에게 답장을 보낸다. 그러면

‘아무개 박사님 고맙습니다.’

라고 답이온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일을 직접 다 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팀의 자원을 이용하는게 연구책임자가 할일이지. 근데 이게 전화가 되면 더 꼴이 웃겨진다. 전화가 온다. ‘아무개 박사님 안녕하세요’ 라고 상대방이 말을 걸면, 내가 뭐라뭐라 통화를 하다가 버벅대려고 하는 순간, 내 모니터 메신저에 노란 불이 깜빡거린다. 그분이 내가 해야할 말을 귀신같이 써주신다. 그럼 나는 그걸 읽는다. 그냥 나는 아바타인 것이다. 물론, 나도 1년 지나면 업무도 파악하고 환경에도 적응할 것이다. 한달 동안 폭풍 야근을 했기 때문인지 이제는 혼자 할 수 있는 일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나도 1년 뒤 쯤에는 정말 박사처럼 일할 수 있겠지 당연히. 그 분도 내가 하는 일을 1년 넘게 했으니 지금은 넘사벽으로 보이는거겠지.’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분은 내가 여태껏 같이 일해본 박사들과 비교하더라도 손에 꼽을 정도로 똑똑하고 일도 잘하고 손도 빠르고 조직친화력도 좋다.

내 의문은 ‘내가 언제쯤 일을 잘하게 될까’가 아니다. 모든 것을 갖춘그 분이 왜 연구책임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분과 비정규직 계약을 종료하고 정규직 연구원 채용한 후, 다른 위촉연구원을 뽑지 않았을까. 그리고 내가 왜 그 자리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이게 누구를 위해 좋은 일일까? (물론 나에게 좋은 것은 확실하다) 검증된 연구원보다, 그냥 검증되지 않은 박사를 정규직으로 뽑는 이유는 뭘까? 심지어 석사 출신도 정규직으로 뽑는데. 누구는 위촉이 되고 누구는 정규직이 되는건가.

재미있는 점은, 우리 기관만 해도 연구직의 30~40퍼센트 가량이 비정규직 위촉연구원이라는 것이다. 석사까지 하고 스물여섯 스물일곱에 나와서 2년짜리 위촉연구원이 되면 스물 여덟, 스물아홉이 되는데, 그 2년동안 엄청 능력을 인정받은 일부는 2년 간 더 계약이 연장 된 후, 서른, 서른한살이 되어서 정규직 자리를 찾아봐야 하는 상황에 빠지는 경우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글쎄…. 그 분이 정규직 연구원이 되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원하는 삶의 방식이 있고, 주어진 삶의 환경이라는게 다르다. 글에서 선택한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뭔가 안타까움이라든지 설움이라던지 하는 느낌은 그 분의 모습을 봤을 때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당당하게 자기 일 잘하는 한 사람이고, 자신의 역할과 범위를 엄청난 밀도로 꽉 채우는 그런 느낌의 사람이다. 내가 어떤 회사의 사장이고, 그 분이 우리 회사의 비정규직 직원이었다면 나는 분명히 그 분에게 중요한 자리를 맡겼을거다. 나 같은 박사받은 초보가 아니라. 하지만, 우리 기관에는 그렇게 했던 사례도 없고(내가 여기 온지 한달 반정도 되었으니 모를 수도 있겠지만), 방법도 없다.

학위라는게, 학벌이라는게 1년도 넘게 검증된 인재 앞에서 다 무슨 의미인가 싶다. 물론,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없다는 것 잘 안다. 고려해야할 측면이 너무 많다는 것도 잘 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원고가 이미 목표한 수준의 3배 이상이 되었으니, 다음 기회로 할말을 미뤄본다.


댓글

taegon May 24, 2016, 12:06 p.m.

재미있네요.